[사람 人] 중국-한국-미국 팔색조의 삶 량리리씨
중국 태생으로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 약력 물었다. 하얼빈 사범대학 국어국문학(중국어)과 졸업, 대학원 수료. 하얼빈 고등학교 교사, 하얼빈 교육청 과장(장학사급), 중국 1급교사 자격, 국가 아나운서 발음 자격, 고려대학교 중국어 강사, LG그룹 인화원 중국 전임강사, 한국 육군정보학교 강사, 포항제철 연구소 강사, LG그룹 중국담당 강사…. 그녀의 한국 이름은 양경애, 미국 이름은 릴리 양, 중국 이름은 량리리(梁莉莉)다. 한자 그대로 풀어보니 향기가 난다. 자스민 꽃(莉)이 두개나 있다. 요철이 있는 이민자의 삶을 껴안고 서해를 건너고 태평양을 건넌 그녀의 삶에는 중국에 대한 자부심과 한국에 대한 사랑, 미국에 대한 긍지가 묻어 난다. 오늘 ‘사람in’은 자스민 향을 따라 나섰다. "한국서 중국통 명성, 딸 교육 위해 미국행…무역 등 새로운 도전" "중국인은 자존심 대단, 무시 당하면 협상 결렬…거래에 관리 끼면 안전" #장면 1 -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1954년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한(漢)족이다. 인터뷰 중에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정확한 연도까지 쏟아져 나온다. -중국에서 어땠습니까? "38년 살았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저희가 참 어려운 세대였죠. 문화대혁명(10년간의 극좌 운동)이 제 인생을 바꾼 거 같아요. 학교에서 영어를 못 가르치게 하고 학교도 자기 성(중국의 지방단위)에만 가게 합니다. 결국 하얼빈 사범대학을 가게 됐는데 베이징 대학을 갔다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공부 잘 하셨나봅니다.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인구가 4000만명인데 거기서 열 손가락안에 한 두번 들었습니다.(웃음)" -한국과 인연이 참 묘합니다. "저보다 아버지가 먼저 한국과 인연을 맺었어요. 1924년생이죠. 항일투쟁을 하셨죠. 팔로군이셨어요. 중국에도 광복이 오고 일본군이 물러가고 5년 뒤 다시 소집했답니다. '장개석 군이 미군과 함께 중국으로 오고 있다. 우리가 나가야 한다' 해서 다시 전장으로 나갔는데…압록강 넘어서 남쪽으로 가더랍니다. (중공군으로 한국전 참전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군단 3만명 중에 딱 2명이 살아왔답니다. 그 한명이 아버지였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국땅은 중국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한테 한국은 늘 궁금한 곳이었습니다." -그 어렵다는 중국 1급 교사 자격에 순탄한 삶이 보장된 교육청 직원을 던지고 떠나 살아보겠다 결심이 쉽지 않았을텐데. "나아질 것 없는 곳을 벗어나 다른 세계와 접해보고 싶었는데…남편이 하얼빈 과학대학 화학 교수였는데 딸 하나 놓고 일찍 돌아가셔서…딸을 혹시 한국처럼 좋은 곳에서 키울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자신의 한국과 첫 만남은 하얼빈에서 도라지와 고사리를 수입해가던 한국 회사에 의해서다. 그 회사가 하얼빈의 각급 정부 관계자들을 한국에 초청했다. 첫 방문때 한국에 매력을 느낀다. 두번째 방문에서 1급 교사자격을 드밀었더니 학원 강사로 채용 됐고 비자가 나온다. #장면 2 - 한국 서울 아나운서에게나 볼수 있는 정확한 중국어 발음에 역사 문화까지 강의한다는 소문은 이내 퍼진다. 고려대 중국어 강사가 됐다. LG그룹 연수원인 '인화원'에서 접촉이 온다. '중국 시장 개척을 위해 중국을 알고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LG 인화원에 중국 전임강사가 된다. 육군정보학교에서도 포항제철 연수원에서도 강의를 한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책도 4권을 냈고 돈도 제법 벌었다. 하얼빈에 집을 두채 살 정도였다. 당시 한국에선 얼마 안되는 연봉인데 중국에서는 평생 만져보기 힘든돈이었단다. -한국에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제가 92년부터 8년 정도 한국에 살았어요. 정말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거기다가 도전적이기도 하죠. 미주에 한국분들도 그런 정감의 깊이는 비슷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 일하며 가장 뿌듯했던 기억은요? "LG 연수원에서 저하고 중국을 고민했던분이 몇천명은 될텐데. 지금 중국 시장에서 LG가 아주 잘 하고 있는걸 보면 '나도 저기에 한몫을 했구나'는 생각에 뿌듯해집니다. LG가 중국에서 현지인 2만명을 고용해서 제가 매달 교육했는데 그것도 뿌듯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차이 LG가 가지고 있는 기업이념 한국 직장과 중국 직장의 다른 점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것도 중국사람들이 한국과 기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중국과 교역이나 교류할 때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뭡니까. "자존심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합니다. 차별대우 한다는 느낌이나 우습게 본다는 느낌을 주면 그때부터 만남은 해봤잡니다." -한국에서 시쳇말로 잘 나가셨고 지금도 필요한 분인데 미국행을 택하신 이유는? "이해 못하실 수도 있는데 딸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함께 살고 싶었는데… 17살 딸이 입국할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미국은 딸이 학생비자로 갈 수가 있더라구요. 당시는 돈도 좀 있었고 해서 미국에서 딸과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장면 3 - 미국 LA 고등학교지만 ELS에서 시작한 딸은 한번 흔들리더니 악착같이 공부했다.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 메디컬 스쿨에 다니고 있다. 그러기까지는 역경도 많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LA공항에 도착해서 한인택시를 타고 옥스포드 길에 처음 내렸다. 거기서 다시 시작했다. -현재 생활의 느낌이 남다를 텐데? "제가 본의 아니게 글로벌하게 된 것 같아요. 중국을 생각하면 5000년 역사가 뿌듯하고 한국을 생각하면 너무 사랑스럽고 미국에 사는 건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미국생활은 어땠습니까? "와서 중국계 병원 CEO를 했는데 아주 잘 됐어요. 뭐… 오너가 직접하겠다고 해서 그만 뒀습니다. 아쉽지만 좋은 경험이었고 지금은 미국 생활 즐기면서 중국어 가르치면서 중국과 미국간 무역을 준비중입니다. 몇년 전엔 '대박'난 적이 있었는데 사업에 매달리다보니 딸 아이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정리하고 딸아이한테만 붙어 있었어요. 이제 자기 앞길 개척할만 하니깐 이젠 제것 좀 하려구요." -꿈이 뭐예요. "저를 필요로 하는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을 좀 더 정확하게 신뢰감 있게 만드는게 꿈입니다.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릅니다. 미주에 한국분들도 중국과 교역이나 방문을 많이 하실텐데 제가 아는 한 많이 도와드리고 싶어요. 중국어도 열심히 가르쳐 드릴 겁니다. 언어는 문화의 핵심이니까요." 한.중.미 3국을 당당하게 다니면서 딸 하나 우뚝 키워내며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량리리씨. 그 이름 속의 자스민 향에는 미래의 꿈이 깊게 배어 있었다. ■리리가 전하는 중국 & 중국인 1. “중국 사람에게 배(과일)를 선물하거나 쪼개 나눠먹는 순간 모든 딜은 깨집니다”= 배는 중국어로 이(梨)를 쓴다. 하지만 이것은 이별하다의 이(離)와 발음과 성조가 모두 같아서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는 이별을 원할 때 배를 내민다고 한다. 2. “거북이 선물하면 중국 사람들은 모욕을 느낍니다”= 거북은 한자로 ‘구’를 쓰지만 중국 속어로는 ‘왕팔’로 부른다. ‘왕팔’이란 말은 남편이 부실해 부인이 밖에서 아이를 낳아온다는 심한 욕이라고 한다. 3.“중국과 교역할 때 정부 관리가 개입돼 있다면 하셔도 좋습니다”= 중국에 급격히 자본이 밀려들면서 사기가 넘치고 있지만, 중국의 각급정부(중앙정부, 성정부 시정부등)기 개입돼 있다면 거의 믿어도 된다고 한다. 특히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당 서기’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다. 만난사람=천문권 기자 [email protected]